"너 혹시 그거 보니?"
최근 어디를 가나 두 명 이상만 모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이름도 개학 전날 한꺼번에 베끼던 추억이 서린 탐구생활, 아니 '남녀탐구생활'이다. 정확하게는 tvN〈재미있는 TV 롤러코스터〉내에 코너 중 하나인데, 요즘 이 코너가 그야말로 '대박'이다.

처음엔 나만 모르고 본 사람들끼리 서로 '맞아 맞아'를 연발하며 공감을 나누길래 그저 흔하디흔한 프로 중 하나려니 하고 넘겼는데 이 코너, 생각보다 파장이 길다. 날이 갈수록 이 프로그램을 봤다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고 못 본 사람은 못 본 사람대로 '아 봐야 되는데...'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식이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한편 게으르기도 한, 필자 얘기 되시겠다.) 해서 '아니 대체 뭔데 그래?' 와 같은 심정으로 몇몇 에피소드를 들었다.
그런데, 으흐흐... 그거 내가 가전제품 수리 기사 오면 하는 행동인데? 어라? 공중화장실 편은 완전 내 얘기잖아?... 아닌 게 아니라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공감하다 못해 탄복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급기야 필자 스스로 동하여 동영상을 찾아보게 되었다. (정규방송시간이 토요일 밤 11시다보니 본방사수는 쉽지 않았다. 추가편성시간은 일요일 밤 12시... 이래저래 직접 찾아보는 게 맘 편할 듯.) 이미 본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도 '재미지다'고 느꼈지만 '명불허전'이라 했던가. 입소문으로만 듣던 그 프로를 직접 보자, 그야말로 황송하다 싶을 만큼 눈과 귀가 즐겁다. 이 코너에 나오는 내레이션 식으로 말하자면 쓰바, 득템한 기분이다.

필자, 우연히 라디오에서 특이한 억양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게임 맞고 던가, 피망 뭐라던가, 뭐 어쩌고 하는 라디오 광고에서 '이러다 경품이 쏟아질지도 몰라요. 1타 4피예요.' 라고 무심하게 던지는 목소리를. 이건 또 무슨 억양?, 할 것도 없이 어디 개그프로에서 유행하는 말툰가 보다 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재미있는 TV 롤러코스터> (이하 '롤코')를 보고난 후 기억을 더듬어보니 라디오 광고 속 목소리는 바로 '남녀탐구생활'의 성우 목소리였다. 무심한 듯, 그렇지만 할 말은 있으니 들어보라는 듯, 음절억양 단어억양 문장억양 모두 무시하고 한 톤으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씹어주는 내레이션. 벌써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그 해설의 주인공은 외화시리즈 'X파일'의 '스컬리 요원' 으로 유명한 성우 서혜정이다.
서혜정은 '남녀탐구생활' 이전에도 물론 유명했지만, 뜻하지 않은 이 코너의 성공으로 특유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의 '...해요' 투로 현재 각종 광고에 섭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스컬리 요원' 이후 25년 성우 인생에 다시 한 번 더 전성기를 맞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이 코너의 말투는 이미 여러 프로그램이나 광고에서 수시로 패러디 하고 있으며 몇몇 사이트에서는 '해요체' 댓글놀이가 유행중이기도 하다. 연기자들이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과는 달리 '동물의 왕국' 저리가라 할 만큼 무미건조 케 시크함을 자랑하는 스컬리 요원의 관찰자형 내레이션은 첨엔 다소 어색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코너와 잘 맞아 떨어진다. 또 대개의 프로그램이 연기 후에 해설을 넣는 것과는 달리 '남녀탐구생활'은 화면 없이 성우가 먼저 해설을 녹음하고 배우가 그 해설을 들으며 연기한다고 한다. (그 결과, 독특한 내레이션과 리얼한 연기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쯤 되면 최근 진지한 말투로 웃음을 주는 코너 하나가 연상된다. '남녀탐구생활'의 해설처럼 기존의 정형적인 목소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에 배반되는 내용으로 웃음을 주는<개그 콘서트 'LA 쓰리랑'>'한국어 듣기 능력평가'의 여자 성우 목소리 말이다. 살면서 한번 이상은 들어봤음직한 표준 규격의(?) 억양으로 매우 깨는 멘트를 읊조리는데 그게 또 엄청 웃긴다. 아래 예문은 얼마 전 방송되었던 'LA 쓰리랑' 코너에서 ‘한국어 듣기 평가’의 문제로 나온 내용이다.

1. 다음 한국 방송 프로그램의 줄임말로 옳은 것은?
A. 우결 : 우사인 볼트는 결식아동
B. 일밤 : 일요일 일요일 밤에
C. 별밤 : 별꼴이야 밤마다
D. 미수다 : 미친 수능 다신 안 봐
E. 개콘 : 개 사료용 콘 샐러드
요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조곤조곤 씹듯이 발음하는데 웃음이 안 나올 재간이 있겠는가. 물론 두 코너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대놓고 숨어있다. 바로 공중파와 케이블의 차이다.<개그 콘서트>가 아무래도 공중파 방송이다 보니 선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구사한다면, '남녀탐구생활'의 내레이션은 기존의 해설이라는 기능에 갖고 있는 시청자들의 기본적인 상식 내지는 자체 검열을 과감하게 뒤엎어 주신다. 이런 된장, 이런 우라질네이션은 기본이고 이런 쓰바, 이런 썅 등 고품격, 교양 있음직한 말투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들이 줄줄이 비엔나마냥 엮여 나온다. 게다가 정확한 발음으로 꾹꾹 눌러주는 것도 모자라 그 주옥같은 멘트대로 배우들이 움직여주니 그야말로 세심하고 훈훈한 방송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서로 다른 남녀에 대한 심층적 분석
'남녀탐구생활'은 똑같은 상황에 처한 남자와 여자의 각기 다른 방식, 반응, 심리를 주제별로 풀어놓은 코너다. 얼핏 보면 그동안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에서 차용했던 짧은 재연 단막극 형식이다 보니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너무나 자연스럽게'경찰청 사람들', '위기탈출 넘버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를 만큼 밋밋하고 단순한 화면 구성에 무엇 하나 차별화를 둔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녀탐구생활'이 다루고 있는 '주제'만큼은 다르다. 앞서 말한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실화를 재연하는 형식인 반면 '남녀탐구생활'은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행동양식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 만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도 없다 하겠으나, 평범한 남자 혹은 평범한 여자 대부분에게서 나오는 공통된 행동양식을 보여주다 보니 설령 그것이 내가 하는 행동이나 심리와 완벽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맞어, 여자는 내가 봐도 그래' 라던가 '어쩜 남자친구랑 저렇게 똑같니' 와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내 얘기건 내 친구 얘기건 지나가다가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건, 그야말로 실생활에 심하게 공감 가는 행동양식들을 골라서 펼쳐 보이는 리얼리티의 향연이 바로 이 코너만의 장기이자 미덕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남녀탐구생활' 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치밀한 '디테일'에 있다.
큰 웃음보다는 극의 진행 내내 깨알 같은 재미를 주는 형식이다 보니 무엇보다도 남녀의 세밀한 행동묘사는 필수이다. 거기에 정형돈, 정가은의 실제 같이 능청스러운 연기가 어우러져 시청자들로 하여금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코너 자체가 남녀의 세세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디테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보다 앞서 이 코너의 스탠딩 버전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남녀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냈던 '남녀탐구생활'의 전신과 같은 코너가 떠오른다. 다들 기억하실 거다. 강유미, 유세윤의 '사랑의 카운슬러'. 뭐 워낙에 강유미가 '디테일 개그'하면 일가견이 있는 개그우먼이다 보니 그보다 훨씬 전에 '예술 속으로 고고'를 비롯하여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분장실의 강 선생님'과 같은 수작을 수시로 들고 나오는 것일 게다. 그러면서 본 필자, '남녀탐구생활'이 '사랑의 카운슬러'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혹시나 괜히 연관 지어 생각해본다.
그럼 이쯤에서, 아직도 이 코너를 접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주옥같은 에피소드를 올려본다.
공중화장실 편)
남자 : 조준 실수로 쉬야가 손에 튀자 수건의 기능도 겸비한 옷에 그냥 쓱 문지르고, 손을 씻나 했더니 물만 살짝 묻혀서 헤어스타일의 결정체인 구레나룻만을 매만지는 남자. '손 따위는 씻을 필요 없어요. 물은 소중하니까요' 로 마무리한다.]
여자 : 변기에 묻은 17종 71만 마리의 세균이 찜찜해 휴지를 깔고 기마자세로 볼일을 본 후 물비누로 정성껏 손을 씻고 나왔으나, 좀 전에 쉬야가 묻었음에도 손 안 씻고 나온 남자가 주는 김밥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입으로 받아먹는 여자. 여자는 화장실에서 그토록 경계하던 17종 71만 마리의 세균을 삼키는, 9.11 테러와 맞먹는 대참사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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