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산더미처럼 쌓인 일 때문에 연일 밤샘투혼을 하다가 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TV를 켰다. 케이블에서 해 주는 재방송인 듯 했는데 처음 보는 프로그램 하나가 재미있길래 계속 보게 됐다. 화면의 상단에는 [우리 결혼했어요] 라는 제목이 떠 있었고 서인영과 크라운J. 정형돈과 사오리. 그리고 알렉스와 신애가 가상의 부부로 등장하고 있었다. 시트콤이나 꽁트는 아닌 것 같은데 대충 설정만 있을 뿐. 정해진 대본에 따른 게 아닌 약간의 셀프카메라 느낌이 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그날은 세 커플들이 도시락을 싸서 어디론가 간다라는 설정이 주어졌는지 세 커플 다 도시락을 싸서 각자의 행선지로 향했다.
서인영과 크라운 J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정형돈과 사오리는 한강둔치. 그리고 알렉스와 신애는 공원에 소풍을 가는 듯 했다. 그냥 저냥 웃으면서 잘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가 운 건 알렉스와 신애 커플 때문이었다. 방송이라는 거, 그래서 짜고 치는 고스톱 이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들은 정말이지 주어진 설정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 이제 막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예쁜 커플들 같았다. (비록 방송에서는 부부라는 설정이었지만 그들은 부부보다는 연인들 같았다.) 도시락을 싸고 공원에 놀러가고, 그러는 도중 약간씩 보이는 수줍은 스킨십.
그렇지.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연인들은 손을 잡으려고 해도 조심스럽고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도 수많은 망설임 끝에야 가능하지... 그 예쁜 사랑의 설레임과 떨림을 보고 있는데 왜 눈물이 났을까?
나이가 들수록 연애를 하면서 느끼는 건 이런 설레임의 시간들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이다. 연애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든 인생을 오래 산 연륜에서 오는 것이든 아무튼 서로 너무 능숙하다는 것. 그래서 손을 잡는 것도 첫 입맞춤을 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안에 끝낼 수도 있다. (그뿐인가 더 독하게 마음먹으면 그날 밤을 함께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처음. 혹은 몇 번의 연애 속에서는 나도 분명 알렉스나 신애 같았을 것이다. 좋지만 그 마음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는 것. 혹시 너무 빨리 빠져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움. 행여나 이 사랑이 내 작은 실수로 인해서 날아 가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점점 그런 것에 대범해진다. 그야말로 아님 말고 정신으로 무장한 채. 되면 좋고 안 되도 아쉬울 것 없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에 걸리는 시간은 줄었지만 정작 사랑을 할 때의 그 아름다운 설레임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나마 아무도 없는 내 집에서 저 화면을 봤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건 스무 살쯤 되는 여자들의 치기스러움이면 몰라도 이 나이가 되면 그것마저도 추해진다. 울고 싶은데도 울지 못하고, 그 감정을 감추느라 대신 되도 않은 프로그램 비평 따위를 해 댔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했다. 아예 감독이 울리겠다고 작정을 하고 만든 슬픈 영화건, 혹은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 내가 필이 꽂혀서 슬프건 간에 나는 지인들과 영화를 보러 가서 펑펑 울어 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나는 원초적인 감정마저 숨기는데 익숙해진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와 빨리 가까워지겠다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막 사랑한다는 감정이 움틀 때의 그 아름다운 두근거림을 나는 오래 즐기지 못했다. 그저 빨리 내 남자라는 그리고 우리는 연인이라는 도장을 콱 하고 찍어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경험했던 단 한 번의 짝사랑 때문인지도 모른다.
순진스럽게도 나는 알렉스와 신애가 정말로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믿는다. 작가와 PD들의 지시 하에, 수많은 스텝들 앞에서 각본대로 움직이는 그들이 정말로 그런 감정이 생길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그래도 믿어버리고 싶다. 그 두 사람이 설레고 있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걸 말이다. 비록 낚임성 기사에 가십을 제공해주는 정도를 위해 연출된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들에 관한 기사라도 나면 정말로 믿어버릴지 모르겠다. 그건 내가 아직도 순수를 믿고 있으며 그날 흘린 눈물이 거짓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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